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컷오프(Cut-off), 감추기와 드러내기의 한 방식

 

 

 

송수민의 <膜막 : 가려진 풍경>전

글. 임랑(문화비평, 소설가)

 

 

이야기가 고조된다. 시청자는 눈을 뗄 수 없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두들 예상은 하고 있다. 기대하던 장면이 화면을 가득 채울 것이다. 그 순간 갑자기 화면은 정지되고 혈관을 타오르던 음악이 뚝 멈춘다. 방송사고인가? 그렇지 않다. 수초간 지속되는 정지(Stop) 상태는 긴장을 최고조로 이끌어내기 위한 수법이다. 이를 컷오프라 한다.

컷오프1_소음의 제거

 

송수민의 근작을 보았을 때 나는 침묵을 목격하였다. 이상하리 만치 그림에서 어떤 소음도 말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당연히 그림이 인터랙티브 기술을 적용하지 않았으니 그런 것 아니냐는 질문을 할지 모르겠다. 분명히 하자면 ‘소음의 제거’란 내가 이 그림에서 읽은 심상을 말하는 것이지 물리적인 기능을 따져 묻는 것이 아니다. 소음의 사라짐, 거대한 침묵과 고요. 이런 일련의 키워드가 떠올랐다.

 

화면 안에는 의미심장한 그리고 과격한 일이 진행 중이다. 그건 분명하다. 그림의 곳곳에는 이 위기의 사건을 추측케 하는 몇 가지 파편들이 숨어 있다. 조금만 신경써서 본다면 누구나 지목할 수 있는 단서들이니까. 그러니까 화면 안에는 누구나 인지 가능한 어떤 대사건, 혹은 재난이 일어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림은 평화롭다. 그리고 고요하다. (<결혼식>,<불> <연기>)

 

마치 영화나 방송의 ‘컷오프’ 기법처럼 그림은 최악의 상황을 정지시킨 것 같다. 그것의 특징은 몰입되어 있던 화면으로부터 떨궈져 나오기는 커녕 오히려 더 화면을 주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통상적인 ‘컷오프’ 기법과 송수민의 작품이 다른 점은 영화는 잠시 후 다시 이야기가 이어지겠지만, 송수민의 작품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최악의 어떤 장면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다.

컷오프2_잘라내기

 

그다음 이상한 점은 실제로 그림 속 이미지들이 컷오프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방송용어로서의 컷오프가 아닌 영어단어 컷오프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잘라내 버린다는 의미와 막는다는 의미. 실제로 송수민의 작품에서 ‘잘라내는’ 행위나 ‘막’ 따위로 가리는 행위는 의미적으로 유사하다.

2016년도에 작업한 <hole>과 <막>은 개념적으로도 구도적으로도 유사하다. 잘라버린 이미지는 화면에서 가장 중심부 상단에 위치한다. 단체사진으로 치면 가장 중요한 인물이 서 있어야 하는 위치, 보도사진에서는 주제에 해당되는 주피사체가 놓여 있어야 하는 위치다.

 

<Hole>이 이야기적인 측면에서는 세부요소를 더 갖추고 있다. 검은색으로 제거된 이미지는 도시이미지 같기도 하고, 중세의 성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검은 이미지 주변으로는 쪼개어진 영토들이 분산 배치되어 있다. 배후의 산으로부터 빙하가 쏟아지려 한다. 검은색 이미지는 그림자 같다. 실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실체가 아니라고 말 할 수도 없다. 어딘가에 무엇이 존재하기 때문에 부수적으로 따라 붙는 것이 그림자니까. 그렇다면 이 그림자 같은, 혹은 유령같은 도시 위로 빙하가 쏟아지는 것은 긍정적인 경고일까? 부정적인 경고일까?

 

도발적인 측면에서는 <막>이 훨씬 더 앞서나간다. 위의 작품이 완전히 비워냈다고 볼 수 없는 ‘그림자 같은’ 이미지를 주되게 삼았다면 이 작품에서는 아예 커팅 한 듯한 이미지가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이미지 뒤로 무엇이 있었는지를 정확하게 알아내기란 불가능해 보인다.(사실 아무것도 없었을 수도 있다) 다만 화면 곳곳에 산발적인 표식들이 있어서 그나마 상상을 해 볼 순 있다. 삼각형의 구조물, 파헤쳐져 누렇게 드러난 땅, 산등성이에 새겨져 있는 흰색 표식들. 이런 장면에 어떤 사물이, 어떤 인물이 놓인다면 주변의 단서들과 어울려 제일 그럴듯한 그림이 될까? 물론 작가는 이런 재미없는 추리를 유도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 것 같지는 않다. 이 추리를 통해 얻어지는 이미지가 썩 유쾌한 장면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단서들을 조립해보면 이 그림은 전쟁을 위한 사전 훈련이나 국지전이 일어나고 있는 특정 지역의 모습을 은폐하고 있다.

오히려 우리는 컷오프하는 작가의 행위, 그 행위가 던지는 도발성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송수민의 작품이 어떤 사안에 대해 다분히 비평적이고 도전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이유는 이런 기법이 주는 날카로움에서 기인한다.

컷오프3_일상의 편집

 

이런 일련의 컷오프 방식은 최근의 연작들 <플라스틱 이파리> 시리즈에도 적용되고 있다. 물론 위의 두 작품이 중심 사물 또는 중심 사물이 놓였을 것이라 추정되는 곳을 가리거나 제거함으로써 얻게 되는 수사와는 좀 다른 결을 가고 있다.

통상 화환이라는 이 사물은 한국에서만 발견되는 의례용 선물인데 쉽게 말하면 어느 자리에 누군가가 왔음을 증명하는, 즉 그 중요 인물을 대체하여 그 분의 뜻을 전달하는 매개체이다. 이런 화환을 얼마나 많이 받을 수 있는가는 사회적 인맥 흔히 사회적 자본이 얼마나 되는지를 드러내 준다. 이런 것을 주욱 세워놓는 방식도 괴기스럽지만, 그 의도가 괴기스러워서인지 화환은 쓸데없이 크고 눈에 띠는 형태로 제작된다. 작가는 이 작품들에서 그 기이함을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커팅기법을 쓰고 있다. 물론 실제로 화면을 잘라낸 것은 아니고 정교하게 가려버리는 방식이다. 꽃이라던가 일부를 구성하던 구조라던가. 그래서 화한은 더욱더 치명적인 기이함을 뿜어낸다. 일상의 한 단면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런 컷오프의 방식이 은근하게 접근된 경우도 있다. <삭제된 핵심-운동장> 시리즈는 빈 운동장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깃발이 아직 걸려있고 펄럭이는 것으로 보아서 운동회나 행사가 진행되는 중인 것 같다. 빈 운동장의 황량함은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그렇지만 외롭게 느껴지는 둥근 구 때문 일 수도 있겠다. 이 그림에서 지워져버린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 아닐까? 신발 한 짝 남겨두지 않고 사라진 사람들. 행사가 끝나 집으로 돌아가 버렸을 수도 있겠지만 정중앙에 위치한 그 하얀색 공 속으로 함몰된 것은 아닐까? 무엇이든 좋다. 작가는 어차피 다의적인 해석을 가능케 하기 위해 일련의 ‘컷오프’ 기법을 쓰고 있는 것이니까.

 

현대미술에 있어서 구조주의를 비판하고 그 중심과 주변을 해체하려는 시도는 계속되어 왔다. 작가 송수민 또한 이러한 줄기의 흐름 속에 위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작가가 정치적 의도를 가졌던 가지지 않았든 일련의 작품이 풍기는 오늘날의 세계에 대한 암울한 전망은 그 자체로 충분히 비평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종종 핵심을 지우거나 가리는 기법은 진실을 감추기 위한 권력자들의 방식이었다. 넌센스 같지만 송수민 또한 오늘날의 재난과 사건의 이미지들을 잘라냄으로써 오히려 진실을 상상하게 만들고 접근하게 만든다. 즉 감추면서 드러내는 방식인 것이다. 그러니까 굳이 저널리즘이나 다큐멘터리적인 시선이 아니어도 진실에 접근하는 것은 가능하다. 보도사진이라는 사실적인 이미지를 조합하고 잘라내고 해체함으로써 진실이라는 층위에 도달하려는 행위인 것이다.

컷오프. 불안한 현대세계를 읽어내고 이에 맞서는 방식, 어두운 밤의 시간을 이겨내는 송수민만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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