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ty flower>, 캔버스에 아크릴,각 60x60, 2018
<Empty flower>, 캔버스에 아크릴,각 60x60, 2018
<Empty flower>, 캔버스에 아크릴,각 60x60, 2018
<Empty flower>, 캔버스에 아크릴,각 60x60, 2018
<Empty flower>, 캔버스에 아크릴,각 60x60, 2018
<Empty flower>, 캔버스에 아크릴,각 60x60, 2018
<Empty flower>, 캔버스에 아크릴,각 60x60, 2018
<Empty flower>, 캔버스에 아크릴,각 60x60, 2018
<Empty flower>, 캔버스에 아크릴,각 60x60, 2018
<Empty flower>, 캔버스에 아크릴,각 60x60, 2018
<Empty flower>, 캔버스에 아크릴,각 60x60, 2018
송 수 민
SONG SUMIN
위기를 돌보는 방법
황재민 평론가
송수민의 그림에서, 시선은 높은 곳에 머물렀다. 예컨대 〈膜(막)〉(2017), 그리고 〈하얀 조각으로부터 시작된 풍경〉(2019)과 같은 작업에서 그랬다. 그림은 하나의 시선을 가정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먼 곳에서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림에서는 늘 무언가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재난의 풍경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그림은 특정한 사건을 재현한 것이 아니었고, 연기를 재난이라고 명명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곳에서 그렇게 벌어지는 일을 먼 곳에서 바라볼 따름이었다.
어쩌면 이와 같은 시선의 작동은 작가가 그림으로 옮길 대상을 찾는 방법과 관련이 있었다. 송수민은 SNS 등에서 수집한 이미지를 엮어 화면을 만들곤 했다. 뉴스 속 이미지들, 발사된 미사일이 남기는 궤적이나 화재로 인하여 뿌옇게 솟구쳐오르는 연기의 형상 등은 작가가 자주 찾는 전유의 재료였다. 이때 작가는 작은 스마트폰 화면으로 재난의 스펙터클을 감각할 뿐, 재난의 현장과는 분리되어 있었다. 자신의 생활세계와 얼마간 동떨어져 있는 스펙터클을 맥락에서 떼어내 그림으로 옮기는 행위는 분명 어떠한 모순을 유발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시선은 더 높은 곳으로, 더 먼 곳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 편으로, 이러한 물러남은 그림을 사변(speculation)으로 이끄는 단서가 되기도 했다. 송수민은 자신이 우연 속에서 감각하게 된 이미지들, 재난의 스펙터클과 같은 이미지들을 직접 인용하지 않았다. 대신 기억을 통하여 인용했다. 이때 기억이란 무언가를 온전하게 보존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오히려 ‘온전하게 기억하기’라는 불가능성을 있는 그대로 맞아들이기 위한 수단에 가까웠다. 잊기와 기억하기 사이에서 이미지는 흐릿해졌다가도 되살아났고, 원래의 형상을 잃고 유사하지만 다른 형상으로 변형되었다. 기억의 불가능성과 함께, 연기는 재난 그 자체의 연기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굴뚝에서 피어나는 연기일 수도 있는 어떤 것으로 상상될 수 있었다.[1] “기능을 잃고, 목적을 망각한 형상들”에게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주는 것.[2] 그것이 그림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송수민의 시선은 어느 순간 움직였다. 더 높고 더 멀리 나아가는 대신 더 가깝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작가의 그림은 전유한 이미지에 사변성을 부여해 서사적 풍경을 형성하는 방법으로부터 잠시 거리를 두고, 자연적 형상을 보다 가까이에서 묘사하는 방법으로 이동했다. 어째서 시선은 가까이 이동해야만 했을까? 이 변화는 오늘날의 비가역적인 전환과 연관된다. 재난은 이제 멀리 떨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임박한 것으로 재위치되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과 같은 지정학적 위기에서부터 인류세라는 지질학적 세기(epoch)의 도래까지. 예상치 못한 위기가 과거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전지구화가 거대 위험의 가능성을 환기시킬 때, 지구 위 인간 행위자는 갑작스러운 “실존적 착종”을 겪는다.[3] 지구적 기후 변화는 모두를 위기의 공범자로 만들었고, 이를 외면할 수 없기에 그림 속 시선은 땅으로, 더 낮은 곳으로 가까워져야 했다.
《연기 속의 시선》(2024)에서는 그간 그림에 등장하지 않았던 예외적 형상이 등장한다. 아이가 남긴 낙서의 형상이다. 위기를, 재난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송수민은 출산 이후 아이를 돌보며 위기를 더욱 가깝게 감각하게 되었다. 낙서할 줄도 모르고 심지어 펜을 쥘 줄도 모르던 아이가 펜을 붙잡고 ‘무언가’를 그려냈을 때, 작가는 놀라움과 함께 오늘날의 위기와 깊이 착종되었다. 어딘가에서 피어오르고 있을 연기들, 발생했을 비극을 관조해야만 하는 일상의 고통이 돌봄의 기쁨과 분리할 수 없이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남긴 흔적과 부산물을 그림의 소재로 삼는 것은 작가가 피하고 싶었던 일이었다.[4] 그것은 너무 아름답고, 그렇기에 너무 뻔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테다. 그렇지만 작가는 우리 모두의 것인 위기 속에서, 고통을 보다 깊이 감각하게끔 이끌어주는 낙서를 그림에 배치하기로 했다. 누군가 말했듯, 아이는 가부장제의 것도 아니며 부모의 것도 아니며 오직 자기 자신의 것이다.[5] 자기 자신의 것인 아이가 불완전한 근육으로 남긴 우연한 낙서는 심지어 아이 자신의 것도 아니다. 그림 속에 등장한 낙서, 그림도 글쓰기도 아닌 그 낙서는 ‘아무것도 쥐지 못하는 손으로 만들어낸’[6] 가장 약한 것이었으며 그렇기에 가장 의미 있는 잠재성이었다.
송수민은 사포를 이용해 그림 표면을 갈아내곤 했다. 이렇게 표면을 깎아내면 물감의 두께가 비교적 균일해졌고, 그림 속에 접합된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하나의 화면으로 아우를 수 있었다. 그런데 표면을 마감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던 이 작업은, 사용되는 사포의 경도가 강해지며 그림에 보일 듯 말 듯한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 흠집, 틈새, 침식, 그리고 상처와 같은 부정성들. 그것은 현재를 가능케 하는 역량이며[7] 실로 “순수한 잠재성”에 속한다.[8] 불가능한 기억 속에서 그려지는 연기들, 아이의 덜 자란 몸이 만든 낙서의 우연, 그림 표면을 덮은 미세한 상처들. 송수민은 여전히 어떠한 형상을 그리고 있지만, 작가의 작업을 구성하는 여러 수단은 그림을 흐릿하게 만들고 나아가 불투명하게 만든다는 역설이 있다. 그러나 작가는 흐릿하고 불투명한 연기 속에서 시선을 놓치지 않으며, 재난과 위기를 바라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위기를 단순히 제거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돌보아야 한다. 송수민의 바라보기는 이와 같은 돌봄의 사례다.
[1] 송수민, 작가노트, 페이지 표기 없음.
[2] 송수민, 같은 글, 페이지 표기 없음.
[3] 울리히 벡, 엘라제트 벡 게른스하임, 『장거리 사랑』, 이재원, 홍찬숙 옮김, 새물결, 2012, 135-136쪽.
[4] 송수민과의 대화, 2024년 2월 8일.
[5] 소피 루이스, 「어머니 역할」, 머브 엠리 외 지음, 『재생산에 관하여: 낳는 문제와 페미니즘』, 박우정 옮김, 마티, 2019, 46쪽에서 재인용.
[6] 송수민과의 대화, 2024년 2월 8일.
[7] 릭 돌피언, 『지구와 물질의 철학』, 우석영 옮김, 산현재, 2023, 135쪽.
[8] 릭 돌피언, 같은 책, 144쪽.